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셀 르페브르 (문단 편집) === 교리의 측면에서 ===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개혁지침에 반기를 들고 복고주의 노선을 고집해 온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82)가 지난 6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요청을 무시한 채 4명의 주교를 서품함으로써 지난 1세기만에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파문을 당했다. <관련기사4면> > >현행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청의 승인 없이 어느 주교든지 임의대로 주교서품식을 거행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양측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된다. > >이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뿐 아니라 서품 받은 4명의 주교도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지난 76년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성무집행을 정지당한바 있다. >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교서품식 라루전인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주교서품식을 갖지 말 것을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를 무시했다. > >복구주의를 고수해오고 있는「성 비오 10세 사제회」에 의해 운영되는 스위스「에콘」신학교에서 지난 6월 30일 거행된 주교서품식에는 7천여 추종자들이 참석했다. > >한편 로마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과 관련, 코뮤니케를 발표하고 교회법 1013조를 인용, 어떤 주교도 사전에 교황의 위임을 받지 않고 주교를 서품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 >6월 17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이루어진 주교서품은 명백하게 교황의 뜻을 거역한 것이라고 밝힌 교황청은 특히 교황성하께 대한 불복종과 그에 속한 교회구성원들과의 일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교회법 751조 규정에 의한 분열행위를 정식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 >교황청은 이에 따라 르페브르 대주교나 그에 의해 서품된 주교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 >한편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에 앞서 진리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티깐의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주교들에게 보냈다. >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추종자들에게 주교서품식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일치된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요청했었다. > >또 교황청은 화합을 모색키 위해 르페브르 대주교가 요구해온「성 비오 10세 사제회」의 신학교를 인정하는 화합방안을 세부적으로 검토해왔는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처음으로 그 계획안에 동의했으나 그 후 이의를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6월 9일자 서한을 통해 주교서품식을 거행 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 >이 서한에서 교황은『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그대의 행위가 교회분열을 조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주교서품계획을 포기할 것을 요구 한다』며『그대가 주교서품으로 인한 교회법적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겸손 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 >한편 르페브르대주교는 18년 전「성 비오 10세 사제회」를 결성한 후 지금까지 2백 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비롯 프랑스 서독 이태리 미국 아르헨티나등지에 5개 신학교를 세워 2백여명의 신학생을 양성해왔다.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16780&acid=3|교황청 금지불구, 주교 4명 서품한 불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다음은 성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마찰을 일으켜온 일지를 종합해본 것이다. > >▲1974년 11월 11~13일 교황 바오로 6세의 요청으로 성청 성서위원회 알베르트 데스 캠프 주교와 교회법개정위원회 귈라우메온클린 몬시뇰이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방문함. > >▲1975년 6월 피에르 마미 주교가「에콘」신학교에 대해 교회법으로서의 승인을 거부함. ▲1975년 6월 10일 교회의 최고법정인 대심원은 신학교의 승인여부에 대한 판결을 해줄 것을 호소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했다. >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은 교회 내에 커다란 상처를 가져오는 것임을 인식, 교황청에 순종할 것』을 호소. > >▲1976년 6월 29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불법적으로「에콘」에서 13명의 사제와 13명의 차부제서품식을 거행. > >▲1976년 7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모든 사제직으로서의 권한을 정지시킴. > >▲1976년 8월 29일 교황의 명령에 도전, 르페브르 대주교는 프랑스「릴」스포츠광장에서 6천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 > >▲1976년 10월 11일 15페이지에 달하는 라틴어서한에서 교황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왜곡된 교회론을 채택, 교회에 반항하기 시작했다』고 비난. > >▲1977년 5월 13일 르페브르 대주교 측근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2명의 바티깐신학자들과 신앙교리성 고문과 며칠간의 회담을 끝냈다고 발표. > >▲1977년 7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칼라너 신부는 한 인터뷰에서『르페브르 대주교의 파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교회내의 분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언급. > >▲1979년 1월 10일 신앙교리 성장관 프란조 세퍼 추기경과의 만남 후 르페브르 대주교는 화합을 목표로 한 이번 회담의 결과는 낙관적이라고 발표했다. > >▲1979년 9월 11일 바티칸대변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던 문제점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합의를 보았다는 보도를 부인. > >▲1979년 1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에서 세퍼 추기경과 남몰래 만났으나 바티칸은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와 밀접한 소식통은 성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전함. > >▲1982년 6월 24일 現신앙교리 성장관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직무정지를 다시 확인. > >▲1983년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 사제회」총장직을 사임, 후임에 고위 장상인 프란츠 쉬미드베르거 신부를 임명. > >▲1987년 1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자유선언에 관한 자신의 보수적 지침의 설명을 담은 1백 50페이지의 문서를 바티칸에 전달. > >▲1987년 6월 14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라칭거 추기경은 바티칸에서 1시간 이상 회담을 갖고 개방과 상호대화의 분위기를 언급한 합동성명서를 발표. > >▲1987년 10월 2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와 성찬예식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사제회를 인정하는 바티칸의 화해방안에 동의했다고 발표. > >▲1987년 10월 17일 바티칸은 르페브르대주교가「사제회」를 심사하기위해 바티칸에서 임명한 방문객 명단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고 발표. > >▲1988년 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몇몇 문제점에 대해 거의 합의를 봤지만 그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경우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를 임명할 것이라고 위협. > >▲1988년 4월 8일 라칭거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격려. > >▲1988년 5월 23일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부분적인 일치를 본 것도 없다고 발표. > >▲1988년 6월 15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은 6월 30일 예정대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 바티깐대변인은 그 같은 결정은 교회법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16961&acid=3|교황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논쟁 일지]]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82)가 최근 바티칸의 지시를 거부하고 지난 6월 30일 자의로 4명의 주교를 서임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1백여년 만에 또 다시 파문이란 큰 상처를 안게됐다. > >지난 30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주교서품을 반대하는 공식적「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 자신이 창설한 스위스 알프스 산록에 있는 에콘신학교에서 7천여명의 추종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주교서품식을 가지고, 프랑스ㆍ스위스ㆍ스페인 영국인등 4명을 주교로 서품했다. >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에 대해 바티칸은 교회법상 교황이 승인하지 않은 주교서품식을 강행할 경우 르페브르 대주교는 물론 서품 받은 사람들도 자동 파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식을 강행하자 즉각 이들에 대해 파문조치 했다. > >이번에 파문당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동안 교회 내에 알려진 보수주의자로서 교회의 쇄신과 전례의 토착화에 이정표가 됐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온 인물이었다. >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은 각국교회들이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해왔으며 교회가 성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타협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에 발맞추려는 교회의 쇄신과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에 대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러한 보수적인 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해석을 둘러싸고 1968년 이래 바티칸과 충돌을 빚어왔으며 197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무집행중지처분까지 받았다. > >뿐만 아니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이「신앙의 장애」가 되어왔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거짓신의 사도이며 반 그리스도교적 현대주의 대표자」라고 비방을 되풀이해왔다. 또한 그는 진정한 가톨릭신자는 그러한 교황과 교계제도에대해서 의무를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바티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임무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반교회적인 언동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다른 종파로 분리돼 나갈 경우 미칠지 모르는 교회의 이미지 및 파란을 피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그를 설득해 왔다. >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지난 5월 5일의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만남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리문제에 관한 교황의 측근 고문인 라칭거 추기경은 수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사목을『전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인정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천한 4명중 1명을 주교로 서품하도록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이 서명한 합의를 깨뜨리고 다음날인 5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멋대로 합의안을 비난하고『4명 모두의 서임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의 추종자를 설득하여 교계제도 내로 수용하려는 바티칸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 >제2차 바티깐공의회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적 신자를 추종자로 갖고 있는 르페브르 대주교는 18년 전「성 삐오 10세 사제회」라는 분파를 창설한 이후 2백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이밖에 2백여명의 신학생들이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미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본산지인 스위스「에콘」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5백여개의「예배장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수백만명에 이르는 「신심 깊은 동조자」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또「에콘」의「사제회」본부의 사제들은 오전 6시에 기상, 구식수단을 입고 구식 라틴어 예식으로 성무일도, 묵상, 미사봉헌 등의 사무를 보고 있으며, 양조용 포도밭을 경작, 직접 포도주를 담고 있기도 하다. > >그러나 수백만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정통 로마가톨릭신자들에 의해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파리」대교구 대변인 장미셀 디파코 신부는『이 운동의 세력이 프랑스에서 3만, 세계적으로도 50만을 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 >1870년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훈령에 반발하여 교회를 이탈한「고(古)가톨릭신자」들이 결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과 수십만으로 위축된 것과 비교해본다면, 이번 파문된 르페브르대주교의 사제회도 소수의 추종자만 가진 뒤 몰락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전망이다. > >그러나 그 숫자상의 세력이 어떻든 간에 르페브르 대주교의 전통주의적 운동이 신앙과 전례문제에 있어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티칸의 다음 조치가 주목되고 있다. > >강동수 기자 >----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16965&acid=3|프랑스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해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의 이단적 움직임은 내면의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전의 공의회들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장하는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공의회들의 진리를 보장하고 있다.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대해서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바티칸을 무시한 채 새로운 주교들 축성을 감행하였고, 바티칸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파문되었다. >---- >『현대 가톨릭의 위기진단』 >□논단•신앙의 현재 상황<2> > >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발견 ''' >'''요셉 라칭거 추기경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 > > > > >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 > > >'''대치되는 양쪽의 잘못''' > >대화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사건, 즉 1985년에 폐막 20주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2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년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훌륭한 문헌들이 가진 중요성과 풍요로움, 그 시의적절함과 필요불가결함을 놓고, 오늘날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치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교리성 장관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를 보고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은 몇몇 주석자들이 공공연히 이에 관한 의문을 던져 보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라칭거 추기경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결정들을 옹호한 발언들은 매우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말들을 강조하였다. >무수한 예 가운데 그가 1975년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즈음하여 작성한 논문을 하나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브릭센에서 나는 추기경에게 그 논문의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 주었다. 그는 그 논문에서 그가 가졌던 입장을 아직껏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가 있기 10년 전 그는 벌써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 황혼기에 서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쪽에서는 공의회를 완전히 한물간,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현대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지사로 다루고 있다. 그 반대로”, ‘보수’진영은 “공의회를 오늘날 가톨릭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화근으로 여기고 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의 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환원이나 거의 환원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했다.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먼저 들려주어야 할 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및 트리엔트 공의회와 동일한 권위에 의해, 즉 교황과 그에 결합된 주교단에 의해 지탱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주 엄격하게 앞선 두 공의회를 계승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점에서는 그들 공의회에서 쓰여진 단어까지 섞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라칭거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로는, “(가톨릭 신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찬성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반대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백히 표현하고 이해한 대로 이 공의회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톨릭 교회의 구속력 있는 전통(verbindliche Tradition), 특히 두 개의 지나간 공의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극단적인 형태의 이른바 ‘진보주의’에 해당한다. 둘째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찬성하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대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인하는 자는 그 두 공의회를 낳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두 공의회를 그 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극단적인 형태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전통주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것을 택하건,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만 유지해야 할 전체(결국 교회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면목''' > >거의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문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 그리고 요셉 라칭거가 여기에 속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보기에는 공의회 이후 시대의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한, 문헌의 다양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공의회 이후의 시대에 대한 라칭거의 판단은 매우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로서는 지난 10년이 극도로 부정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공의회 이 후의 전개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에서 비롯된 모든 이의 기대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초대 교회의 말기 이래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더 소수파가 되어 있다. >추기경은 자신의 냉정한 판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는 대화 도중에도 이를 되풀이했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 하든 놀랄 일이 못된다. 그는 그것을 자주 강조했던 것이다.) “교황들과 공의회의 교부들이 기대했던 것은 가톨릭의 새로운 일치였는데 드러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ᅳ 바오로 6세 성하의 말씀을 빌리자면 ᅳ 자기 비판으로부터 자기 파괴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여요. 새로운 감격이 기대되었는데 너무 자주 권태와 의기소침에 빠져 버렸습니다. 일보 전진이 기대되었는데 드러난 것은 붕괴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자칭 ‘공의회의 정신’을 근거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럼으로써 공의회의 이름은 더 더욱 모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벌써 10년 전에 결론을 내렸다. “교회의 참된 개혁의 전제는 지금까지 의심할 바 없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잘못된 길로부터 깨끗이 결별하는 것임이 분명히 거론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라칭거는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은 공의회 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비판적인 성직자는 덧붙이기를, 그것은 설계도를 분실해 버려 각자 자기 생각대로 집을 짓는 공사장이라 했지요.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이나 그 정통적인 문서들에 있을 수 없고, 공의회 이후의 그러한 전개는 공의회 교부 들의 문헌에도 반하고, 정신에도 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되풀이하고자 했다. >추기경은 말했다. “저는 확신합니다만,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에 입은 각종 손해는‘참된’공의회에 탓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ᅳ 내부적으로는 ᅳ 잠재 해 있던 다원적이고 원심적인 여러 힘이 전면에 부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서방의 문화 혁명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데 그 까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견,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그의 요망은 정녕 “되돌아가자”가 아니고, “근원이 되는 공의회의 정통 문헌으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그는 반복한다. 그에게는 “오늘날 교회의 참된 전승의 옹호는 공의회의 옹호 입니다. 우리들이 가끔(‘우’로건 ‘좌’로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의 ‘단점’, 전승의 포기라고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예요. 있는 것은 연속성이요, 이 연속성은 과거로의 후퇴도 앞으로의 도피도, 시대 착오적인 향수도 터무니없는 초조함도 용납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오늘’에 충실히 머물려야만 하지 ‘어제’나 ‘내일’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교회의 오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이지요. 내용을 잘라내거나 독단적으로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은 그 문헌 말씀입니다.” > >'''시대 역행에 대한 묘약''' > >라칭거는 ‘좌경’에 비판적인가 하면, ‘우익’에 대해서도, 또 마르셀 르페부르 대주교로 상징되는 저 완벽한 전통주의에 대해서도 오해의 여지없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만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저는 그 비논리적인 자세에는 아무런 장래도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가는 출발점은 특히 비오 9세와 비오 10세의 가르침 ᅳ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교황 우위권에 대한 엄격한 충성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비오 12세까지만 있고 그 다음은 없는 것입니까? 성좌에 대한 충성은 시대에 따라 또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확신에 얼마나 가깝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로마가 ‘왼쪽’을 신경썼다면 아직 ‘오른쪽’에 대해서는 동일한 강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이에 대하여 추기경은 “몬시뇰 르페부르의 지지자들의 주장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 이야기는 공을 세운 노(老) 대주교에 대하여는 즉각 성직 정지라는 엄벌로 대응하면서, 다른 방향을 향한 온갖 탈선은 이해할 수 없이 참는다는 거예요. 저는 이 방향 또는 저 방향을 향한 크고 작은 논쟁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순의 두 유형은 완전히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사실 ‘왼쪽’으로의 일탈은 교회의 현재 사고와 행동의 광범한 흐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만 거의 어디서도 그 공통된, 제대로 파악할 만한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르페부르 대주교의 활동은 그에 반해 추정컨대 수적으로는 훨씬 적게 퍼져 있기는 해도 뚜렷히 구획된 교회법 기구와 신학교와 수도원 따위를 갖고 있습니다. 르페부르 몬시뇰이 화해에의 희망 속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행하지 않고 있는 주교 성성을 결심한다면 언제라도 있게 될 정식 ‘이교’(Schisma)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이 대화의 시점에서는 아직 주교 성성이 행해지지 않았었고, 그 후 르페부르 주교도 사망했음. ᅳ 옮긴이 주).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과거에는 막 생겨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의 자세가 없었다고 비판한다면,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물론 하나의 행동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온갖 기회를 활용해야만 합니다.” 라고 응답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르페부르는 사제를 서품했고 또 계속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법은 그 서품이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무효라고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미리 위법한 상태에서이긴 하지만 교회에 대하여는 ‘진정한’ 사제들인 이 젊은이들의 인간적인 측면도 염려해야만 합니다. 각 개인의 출발점과 방향은 확실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내부적인 상황에 매우 강력히 영향받아 그들의 결정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교회에 대한 환멸이 까닭이 되는데, 그 환멸은 그들을 비통함과 부정적 사고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교화의 정상적인 사목 활동 안에서 온전히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나라의 신학교에서 발생한 불만스런 상황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분열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화해를 희망하고 오직 이 희망으로 르페부르 주교의 사제단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르페부르 사건과 다른 시대 착오적인 반항에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그의 처방은 바오로 6세부터 현교황까지의 최근 교황들의 방침을 상기시킨다. “이와 유사한 황당무계한 상황들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공의회 이후의 많은 자의적이고 분별 없는 해석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공의회의 참된 얼굴을 내 보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로 등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그릇된 저항에 대한 원칙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공의회의 정신''' > >“그러나 ‘참 공의회’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추기경도 말씀하셨지만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신개선주의’의 사례들과는 별도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현상황이 어렵다는 데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진단도 그렇고 그 치료에 관해서도 의견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의 ‘진단’에 따르면 ‘위기 현상들은 성장기에 생기는 유일한 열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 현상들을 중병의 징후로 봅니다. ‘치료’로 보자면, 한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문헌을 넘어서라도 보다 포괄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적은 개혁과 변경을 주장합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합니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요?” >추기경은 답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제 진단은 이렇습니다. 치료받고 요양받아야 할 진짜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치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완전히 받아들여져야 할 현실이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사람들이 달려나가면서 멀어지는 출발점으로 볼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그 위에 쌓아 올려져야 할 받침으로 본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의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막 발견하고 있는 그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문헌은 그 선포 시점에서는 참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서감이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문화적인 혁명과 사회적인 변동을 맞게 되었습니다만, 공의회 교부들이 이를 결코 예견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들의 ᅳ 당시엔 시기적으로 빨랐던 ᅳ 답이 그 후세에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지를 혁명과 변동은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문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공의회의 문헌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와 제대로 맞설 바른 도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참된 공의회에 ‘힘입어’교회를 재건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계속하면서 그는 다음 내용을 상기시켰다. 이 참된 공의회는 “이미 공의회의 기간 중에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더 더욱,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로 받아들인 ‘공의회 정신’, 사실은 공의회에 ‘반대되는 정신’이지만, 이로 인해 반대받았습니다. 이 해로운 반 공의회 정신’(Konzils-Ungeist)에 따르면 무엇이나 ‘새로운’ 것은, 또는 보기에 새로운 것은 ᅳ 새로운 것이라 자칭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이 그간 얼굴을 드러냈는지 ᅳ 언제이건 그리고 어떤 경우이건 과거의 것보다 또는 현재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반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교회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 >'''단절이 아니라 연속''' >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가 아주 예리해지기를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공의회 문헌은 가톨릭 정신의 연속성을 재확인할 뿐 어디서도 교회사를 공의회 ‘이전’ 과 ‘이후’로 분리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러한 도식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공의회 ‘이전’ 교회도 없고 공의회 ‘이후’ 교회도 없습니다. 당신 친히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보배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늘 보다 잘 이해하면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사에는 아무런 비약도 없고 아무런 단절도 없고 또 연속성의 아무런 중단도 없습니다. 결코 공의회는 교회를 시대적으로 양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석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는 다음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토론에 붙이는 것은 공의회를 시작한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충실히 이어받은 바오로 6세 교황의 의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두 분에게는 신앙의 유산이란 다툴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보증받은 것이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혹시 일부의 사람들이 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인 ‘사목적’인 측면을 강조하시려는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믿음을 ‘바꾸려고’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현재화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분명한 정체성의 토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 말할 것이 있고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황님들과 공의회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분들 중 일부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너무 무비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낙관론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현대 세계의 긍정적인 것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는 의견이셨다면, 그건 바로 그분들이 그 정체성, 그 믿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근년에 와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의, 그러니까 현대의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자제되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개방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앙 유산의 토대를 토론에 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겐 신앙의 유산이라는것이 더 이상 분명치도 않구요. 사실교회 밖에서발생하기는 했지만, — 정제되고 정돈되면 —사물의 교회적 시야에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들이 있지요. 근자에 들어 사람들은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만 이 두 현실이 서로 충돌 없이 만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교회도 세상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럼 추기경께서는 ‘세상에 대한 반대’라는 옛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시는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이 반대하는 것이지요. 죄와 은총이 기탄 없이 이야기되면 세상은 분노합니다. 무분별한 ‘자기 개방’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에 속하고, 가끔 인간의 심성에 당연한 것으로 그럴 듯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곧 신약성서가 ᅳ 확실히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로 ᅳ ‘세상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자임을 다시금 의식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비타협주의에의 용기를 재발견하고, 대결할 수 있는 능력, 주변 문화의 다양한 경향에 주의를 환기하고 동시에 증상은 안 좋은 데도 느낌은 좋은 공의회 이후의 연대를 단념할 역량을 재발견할 때에 이른 것입니다.” > >'''회복?''' > >이 시점에서 ᅳ 대화의 전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때도 역시 신학교의 뜰에 면한 방의 정적 속에 녹음기는 사각 사각 돌아가고 있었다 ᅳ 나는 라칭거 추기경한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그 답은 가장 활기있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은, 문제되는 낱말(‘회복’)에 감정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미숙함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그 낱말의 내용은 오래된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ᅳ 적어도 우리들의 견해로는 一 과거란 정녕코 되풀이할 수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물어 보았다. “장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교회의 고위층은 공의회 후 시대의 첫 단계를 종식시키려 한다고, 또 (비록 확실히 공의회 이전의 시대로의 회복은 아니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 문헌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교회 고위층은 일종의 ‘회복’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추기경의 답을 그대로 옮긴다. “’회복’이라는 말이 후퇴를 뜻한다면, 그러한 회복은 도무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찾아오실 주님을 앞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뒤로 돌아가다니요, 뒤로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역시 어떠한 ‘회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을 세상에 대한 갖가지 지나친 무분별한 개방 후의,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해석한 후에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그래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즉 가톨릭의 전체성 안에서 여러 방향과 가치의 균형을 새로 잡으려는 의미의 ‘회복’은 지극히 바람직스럽고 교회 안에서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첫 단계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얘기치 못한 결과들''' > >추기경이 내게 말했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해준 것들을 볼 때 악화되었고, 그 행복감의 열매들이 이제 우리 앞에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시대의 징표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저 ‘현실론’을 취하도록 격려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람들이(비현실적으로)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화가 전혀 없었던 양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결과 중 많은 것은 공의회 교부들의 의향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분명 우리는 ‘공의회가 아예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회 사가요 위대한 학자, 영국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헨리 뉴먼 추기경은 말씀하시기를, 공의회는 언제나 교회에게는 위험이며, 그러므로 소수의 사항만 다룰 것이요, 그렇게 오래 끌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시간과 인내와 위험 부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개혁은 위험하니 하지 말자’ 하는 것도 안될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믿는 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 공의회의 진정한 수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문서들은 피상적이거나 한마디로 부정확한 출판물의 홍수 속에 즉각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공의회 문헌의 ‘글자’를 읽어 보면, 그 참된 ‘정신’을 찾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정신이 사실대로 재발견된다면, 저 위대한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게 해 줄 것이요. 새로운 힘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오해함으로써 교회 안에 야기된 손실들을 명백히, 따라서 뼈아프게 바라보는 가톨릭 신자는 바로 그 제2차 공의회 안에서 재활의 가능성도 찾아야만 합니다. 공의회는 주님의 것이지,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길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공의회를 마치 ‘성직자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화석’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는 더 이상 관계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공의회가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Unicum(유일무이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긴박한 문제나 위기의 압력하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관련해서 보자면(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조용한 시점에서 소집된 사상 최초의 공의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적되었습니다. 위기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고,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들어왔습니다.(그런데 추기경께서 앞서 암시하신 것의 하나로 돌아가자면) 교회가 저 문화 혁명을 극복했어야 했다고, 그러니 공의회가 없었다면 교회의 구조가 더 경직되어 손실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공의회 이후의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유연한 교회 구조가, 비록 매사에 더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어쩌면 충격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추기경은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역사는, 특히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길에 따라 인도하시는 교회의 역사는 우리가 가정법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60년대 초기에는 2차 대전 후의 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미 재건된 세계를 만나, 그래서 뭔가 달리 참여를 위한, 일신을 위한 계기를 찾고 있는 전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에의 낙관론과 신뢰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그 밖에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앞으로 조용히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검사성(현 신앙교리성) 제 전임자 옷타비아니 추기경도 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 사업을 지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 공의회의 소집을 공고하신 후, 성청은 세계 주교들 중에서 특히 저명한 대표들과 함께 공의회 교부들이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교과서적이며, 사목적 성격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기각한 저 초안(Schemata)의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기각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동의하신 이 문서에 관한 신속하고 마찰 없는 표결을 기대하셨습니다. 명백히 그 내용 중 어느 것도 교의를 바꾸고자 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교의를 종합하는 것이었고, 기껏 해야 이제까지 분명히 정의되지 않았던 점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개였던 것입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이 이 문서들을 거부 했던 것도 그러한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표현 방식이라든가, 이제까지 없었고 지금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몇 가지 정의(定義)결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의회가 요한 23세 성하께서 기대하신 경과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전통주의와 로마에의 충성의 아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의회가 교회에게 앞으로의 비약이요 쇄신된 삶이며 하나의 새로운 일치를 뜻했으면 하는 요한23세 성하의 기도가 교회 전체로 보아 ᅳ 적어도 아직까지는 ᅳ 받아들여지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 >'''희망의 징표들''' > >나는 불안해서 물었다. “그러면 공의회 이후 시대의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추기경님의 부정적인 시각은 얼마간의 긍정적인 요소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인지요?” >그는 대답한다. “역설적입니다만 확실하게 부정적인 것이 가장 먼저 긍정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신자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고, 이데올로기와의 타협주의의 결과를 체험했으며, 세상의 구원과 자유와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 믿음 없는 세상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론으로만 알았었지요. 이제는 그 실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실상의 공허 안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풍요로움, 믿음의 필수불가결함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힘겨운 정화 같은 것이었고 마치 불을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 과정이 하나의 깊은 믿음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입니다.” >추기경은 계속했습니다. “모든 공의회가 먼저 ‘상층부’의 개혁이고 그 다음에 저변의 신자들로 이행해야 함을 망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공의회가 결실을 가져오려면 어떤 공의회에나 거룩함의 물결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가 그러했었지요. 그래서 참된 개혁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 입니다. 거룩함은 교회의 경우 그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함이 교회 지도부의 명령에서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결과가 언젠가 교회사의 광채로운 시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공의회에 생명을 부여하도록 부르심 받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밀라노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를 기념하면서 말씀하셨듯이,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 새로운 개혁자도 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버티었다. “추기경께서는 그러므로 교회사의 이 시대에 ᅳ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말고는 ᅳ 다른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인정치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저야 긍정적인 것들을 물론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컨대 한국 교회와 같은 젊은 교회의 약진이라든가 박해받아 온 교회의 활력은 차치하도록 하겠어요. 이러한 것들은 바티칸 공의회에는 거의 직접 까닭을 돌릴 수 없고 또 위기 현상들을 직접 공의회 탓으로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교회 전체에 희망차게 울리는 것은 ᅳ 바로 서방에서는 교회가 위기인 마당에—아무도 계획하지 않았고 아무도 호소하지 않았던 바인데, 단순히 믿음의 내적 활력 자체에서 오는 새로운 움직임들의 태동입니다. 이러한 여러 움직임 안에는—더디기는 하지만 ᅳ 교회의 성신 강림의 순간과 같은 무엇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령 운동이라든가, 꾸르실료, 훠꼴라레, 성체와 자유(Communione e Liberazione) 등을 들고 싶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움직임은 여러 문제도 노정하고 있고, 그 안에 크건 작건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다 그러지요. 현재 저는 교회의 완전한 믿음을 갖추고 온전히 믿음에 살고자 하며 그 안에 커다란 선교적 활력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아리가 꾸준히 늘어 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 생활은 열심이지만 거기엔 내심에의 도피도 없고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도 없으며 있는 것은 단순히 충만한 나뉘지 않은 가톨릭적인 것뿐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신앙의 기쁨은 그 안에 널리 번지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의 새로운 성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떠한 사목적인 기획 부서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자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교회 당국은 ᅳ 당국이 아주 진취적이고 싶어한들 ᅳ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 당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들 현재의 모습에의 접함에 긴장은 있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교회의 교계 제도와의 긴장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하나의 새 세대가 부상하고 있어요. 저는 부푼 희망 속에 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강하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리 발휘되고 있어서 놀랍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쇄신은 완만하게, 그러나 효과 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모순과 부정의 취향에 사로잡혀 있던 낡은 형식은 사라지고 어언 새로운 모습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새로운 모습은 지배적인 관념들과의 대화에 아직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과제는— 교회의 교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과제는 ᅳ 이 새로운 모습에 문을 열어주는 것,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현재 아직 지배적인 경향은 실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직접적이고 종교적인 ‘기상 전망’을 바라보는 자라면 계속하여 신앙과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해야지요. 이러한 위기 상황에 편견 없이 맞설 때에만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사목 170호, 121-132면. 교황청과 일치한 전통 가톨릭 성향의 신자 대부분에게는 그 당시의 행보 중 일부(트리엔트 미사 지속, 사제 서품 등)는 불가피했다고 인정받는 편이지만 주교 성성은 독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랬지만 정작 가톨릭 전통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인 교황의 최고 교도권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 것은 지나친 행보로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은 가톨릭의 기본적 믿음이지만, 이 기본적인 믿음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막는게 최고 교도권이 하는 일이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전통의 보전을 강조하면서도, 최고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점을 남겼다 할 수 있다. SSPX에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신념 있는 참된 가톨릭 성직자라고 포장하지만,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 성성 행보는 최고 교도권을 지나치게 경시한 것으로 다른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와 단체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물론 일각의 오해와 달리 '처치 밀리턴트' 등 상대적 소수를 제외하면 많은 교황청과 온전히 일치했거나 완전히 화해한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들은 주교 성성은 비판하지만 르페브르 대주교의 일부 행보(트리엔트 미사, 사제 서품 등)는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또한 과거보다 교황청이 [[성 비오 10세회]]에 대해 온건한 스탠스를 취한다고 해서, 교황청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다. 당장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교황청의 허용만 하더라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오로 미사의 '결함'을 주장하며 트리엔트 미사를 고집했지만, 교황청은 트리엔트 미사와 바오로 미사가 둘 다 '옳으므로'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것이다. 이 둘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물론 성 비오 10세회 및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그리고 기타 전통 가톨릭주의자들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요구가 '여론'이라는 의미에서는 트리엔트 미사의 허용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허용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전반적 입장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수용'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둘은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